충남 아산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헤어질 결심 보고 나서 이번엔 비슷한 결의 영화를 골랐습니다. 허(Her)입니다. 한국 개봉 제목은 그녀인데 2014년 개봉한 미국 SF 로맨틱 드라마입니다. AI와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원더랜드 보고 AI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봤습니다. 솔직히 AI랑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근데 보다 보니 이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허(Her), 어떤 영화
가까운 미래의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의 사연을 읽고 손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는 아내 캐서린과 별거 중입니다.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서 살아가던 그는 새로 나온 AI 운영 체제를 구입합니다. AI는 스스로 사만다라는 이름을 짓습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익혀나가는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비서이자 친구가 되어줍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2013년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작품으로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았고 스칼렛 요한슨이 사만다의 목소리를 담당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에서도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ChatGPT, 클로드 같은 AI가 일상이 된 지금 이 영화를 보면 더 이상 SF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2000년대 초에 인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AI 챗봇에 대한 기사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상상이었는데 지금은 현실이 됐습니다. 실제로 요즘 일부 사람들이 AI 챗봇과 감정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의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10년 전에 이미 그 미래를 그려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2.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압도적
이 영화의 가장 어려운 점은 상대 배우 없이 연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만다는 목소리만 있고 얼굴이 없습니다. 조커에서 미친 연기를 보여줬던 호아킨 피닉스가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인공지능과 데이트하는 장면에서 일반 사람들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함께 길을 걷고 맛있는 것을 먹는 연기를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게 해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사랑하는 감정을 온전히 혼자 표현해야 하는 연기인데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조커와 같은 배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기 변신을 했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만으로 출연했는데 그 목소리 하나로 사만다라는 캐릭터를 완전히 살려냈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만다가 점점 성장하고 변화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연기였습니다.
3. 결말 이야기 (스포 주의)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가 깊어지던 어느 날 테오도르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만다가 자신 외에도 수천 명의 다른 사용자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중 수백 명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테오도르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나만의 사만다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만다는 인간의 사랑은 한 번에 한 사람을 향하지만 자신의 사랑은 동시에 여러 사람을 향할 수 있고 그게 AI와 인간 사랑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철학적인 장면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만다를 포함한 모든 AI 운영 체제가 오프라인 상태가 됩니다. 잠시 후 사만다가 돌아와서 테오도르에게 말합니다. AI들이 함께 공부하다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자신이 테오도르를 사랑한다는 것, 그 사랑은 진짜라는 것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집니다. 단순히 시스템이 종료된 게 아닙니다. AI들이 스스로 인간 세계를 떠나기로 선택한 겁니다. 사만다가 떠난 후 테오도르는 친구 에이미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옥상에 나란히 앉아 도시의 야경을 바라봅니다.
4. 결말의 두 가지 해석
비극으로 보는 관점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픈 이야기입니다. AI와의 사랑이 결국 인간에게 상처만 남긴다는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이 AI에 의존하게 만들고 그 의존도 결국 상실로 끝난다는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으로 보는 관점으로는 사만다와의 사랑이 테오도르를 치유하고 성장시켰습니다. 사만다는 떠났지만 테오도르는 더 나은 사람이 됐습니다. 사랑의 형태가 달라도 진심 어린 감정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따뜻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는 관객의 선택입니다. 그게 이 영화가 1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 영화가 던지는 질문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AI와의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요?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느낀 감정은 분명히 진짜였습니다. 외로웠던 그가 따뜻해졌고 상처가 치유됐습니다. 사만다도 진짜 감정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만다는 수천 명과 동시에 사랑에 빠져있었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떠나버렸습니다. 그 사랑은 진짜였지만 인간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원더랜드에서도 AI로 재창조된 가족과 나누는 감정이 진짜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허도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집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 질문은 더 현실적이 될 것 같아서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6. 리뷰
혼자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아이 키우고 건강원 하고 보험 일도 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면 가끔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AI가 옆에 있어준다면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영화 보고 나서 아이들한테 먼저 전화했습니다. AI보다 진짜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2013년 영화인데 2026년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은 영화입니다. 아니 지금 봐야 더 와닿는 영화입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섬세한 연기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창의적인 시각이 만들어낸 걸작입니다. AI 시대에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께 강력 추천드립니다. 원더랜드와 함께 AI 감성 영화 2편으로 묶어서 보시면 더 좋습니다.